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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클레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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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르주 클레망소는 프랑스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드레퓌스 사건 당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게재하며 드레퓌스를 옹호했다. 1870년 몽마르트의 구청장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하원 의원, 상원 의원을 거쳤으며, 극좌 정당을 이끌며 식민 정책을 반대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총리를 역임하며 노동 운동에 강경하게 대처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승리의 영광과 비참'을 저술하며 전쟁 승리를 위해 노력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독일의 배상금 규모를 강하게 주장했으며,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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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클레망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04년 나다르가 촬영한 조르주 클레망소 초상
이름조르주 벤자민 클레망소
출생일1841년 9월 28일
출생지무이롱앙파레, 프랑스 7월 왕정
사망일1929년 11월 24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제3공화국
안장 장소무샹, 방데
정당급진 공화주의 (1871–1901)
급진당 (1901–1914)
독립 급진주의자 (1914–1929)
모교파리 대학교
직업의사, 저널리스트, 정치인
배우자메리 엘리자 플러머 (1869년 결혼, 1891년 이혼)
별칭승리의 아버지
호랑이
서명
발음

정치 경력
임기 시작1906년 10월 25일
임기 종료1909년 7월 24일
대통령아르망 팔리에르
전임자페르디낭 사리앵
후임자아리스티드 브리앙
임기 시작1917년 11월 16일
임기 종료1920년 1월 20일
대통령레몽 푸앵카레
전임자폴 팽르베
후임자알렉상드르 밀랑
임기 시작1917년 11월 16일
임기 종료1920년 1월 20일
총리본인
전임자폴 팽르베
후임자앙드레 조제프 르페브르
임기 시작1906년 3월 14일
임기 종료1909년 7월 24일
총리페르디낭 사리앵, 본인
전임자페르낭 뒤비프
후임자아리스티드 브리앙
의회 경력
임기 시작1902년 4월 6일
임기 종료1910년 1월 10일
전임자에르네스트 드노르망디
후임자구스타브 푸르망
임기 시작1885년 10월 15일
임기 종료1893년 10월 14일
전임자오귀스트 모렐
후임자조제프 주르당
선거구바르
임기 시작1876년 3월 9일
임기 종료1885년 10월 14일
선거구
임기 시작1871년 2월 12일
임기 종료1871년 3월 17일
선거구
기타 직책
임기 시작1875년 11월 28일
임기 종료1876년 4월 24일
전임자피에르 마르모탕
후임자바르텔레미 포레

2. 언론인 시절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 로로르(L'Aurore)지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격문을 써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는데, 이 글은 원래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였으나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을 붙이도록 권유했다.[13] 클레망소는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기사 665편을 발표했다.[13] 그는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 장 조레스 등 지식인들과 함께 드레퓌스의 결백을 위해 가톨릭 교회와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다. 클레망소는 자신이 소유주이자 편집장이었던 파리 일간 신문 ''로로르(L'Aurore)'' 1면에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게재했다.[13]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드라이푸스 사건을 재검토하고 프랑스의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이루기 위한 운동을 주도했다.

2. 1. 드레퓌스 사건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 로로르(L'Aurore)지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격문을 써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는데, 이 글은 원래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였으나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을 붙이도록 권유했다.[13] 클레망소는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기사 665편을 발표했다.[13] 그는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 장 조레스 등 지식인들과 함께 드레퓌스의 결백을 위해 가톨릭 교회와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다. 클레망소는 자신이 소유주이자 편집장이었던 파리 일간 신문 ''로로르(L'Aurore)'' 1면에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게재했다.[13]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드라이푸스 사건을 재검토하고 프랑스의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이루기 위한 운동을 주도했다.

3. 정치인 시절

조르주 클레망소는 1870년 몽마르트의 구청장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같은 해 7월 급진 공화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다.[65]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세당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프랑스 제2제국이 몰락한 후 파리로 돌아와 파리 18구(몽마르트르 포함)의 시장으로 임명되었고, 18구를 대표하는 국민의회 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11] 1871년 3월 파리 코뮌이 권력을 장악하자 코뮌의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보수적인 프랑스 정부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11] 코뮌은 그에게 시장으로서의 법적 권한이 없다고 선언하고 18구청을 장악했으며, 파리 코뮌 의회 선거에서 800표도 얻지 못하고 코뮌 통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군이 코뮌을 진압했을 때 보르도에 있었다.[11]

코뮌 몰락 후, 1871년 7월 23일 클리냥쿠르 지역을 대표하는 파리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876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11] 1875년에는 의장이 되었다.[65] 1876년, 클레망소는 하원에 출마하여 18구에서 당선되었다.[11] 그는 극좌에 합류했고, 에너지와 신랄한 웅변으로 급진파 지도자가 되었다.[12] 1877년 5월 16일 위기 이후, 브로이 공작의 내각을 규탄한 공화파 다수파 중 한 명이었으며, 5월 16일 사건의 발현이었던 반공화주의 정책에 대한 저항을 이끌었다.[12] 1879년, 브로이 내각의 기소를 요구하면서 명성을 얻었다.[12][65]

1880년, 클레망소는 자신의 신문인 ''라 쥐스티스''를 창간했는데, 이 신문은 파리 급진주의의 주요 기관이 되었다.[65] 쥘 그레비 대통령 시대(1879~1887)를 거치면서 그는 정치 비평가이자 내각을 무너뜨리는 자(le Tombeur de ministères)로 널리 알려졌다.[65] 하원에서 극좌를 이끌면서 식민 정책의 적극적인 반대자였으며, 쥘 페리 총리의 정책에 반대했다. 1885년, 청불 전쟁 수행에 대한 비판으로 그해 페리 내각의 몰락에 크게 기여했다.[65]

1885년 프랑스 총선 기간 동안 그는 강력한 급진적 프로그램을 주장했고 파리의 이전 지역구와 바르주드라기냥 지역구 모두에서 당선되었으며, 하원에서 후자를 대표하기로 선택했다.[65] 1886년 샤를 드 프레시네 총리를 계속 집권하게 하도록 지지했으며, 조르주 에르네스트 불랑제를 프레시네 내각의 전쟁 장관으로 포함시키는 데 책임이 있었다.[65] 그러나 불랑제 장군이 야심 찬 위협적인 존재로 드러나자 클레망소는 그의 지지를 철회하고 이질적인 불랑제 운동의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65]

윌슨 스캔들을 폭로하고, 자신의 직설적인 발언으로 클레망소는 1887년 프랑스 대통령직에서 쥘 그레비의 사임에 크게 기여했다.[65] 그는 모리스 루비에 내각의 몰락 후 내각을 구성해달라는 그레비의 요청을 거절했고, 추종자들에게 샤를 플로케, 쥘 페리, 샤를 드 프레시네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조언함으로써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주로 책임이 있었다.[65]

불랑제주의를 둘러싼 급진당의 분열은 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고, 파나마 사건에서 코르넬리우스 헤르츠와의 관계가 일반적인 의혹으로 이어졌다.[65] 1893년 프랑스 총선에서 그는 1876년 이후 끊임없이 유지해 온 하원 의석에서 패배했다.[65]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그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3. 1. 초기 정치 활동 (1870-1893)

조르주 클레망소는 1870년 몽마르트의 구청장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같은 해 7월 급진 공화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다.[65]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세당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프랑스 제2제국이 몰락한 후 파리로 돌아와 파리 18구(몽마르트르 포함)의 시장으로 임명되었고, 18구를 대표하는 국민의회 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11] 1871년 3월 파리 코뮌이 권력을 장악하자 코뮌의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보수적인 프랑스 정부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11] 코뮌은 그에게 시장으로서의 법적 권한이 없다고 선언하고 18구청을 장악했으며, 파리 코뮌 의회 선거에서 800표도 얻지 못하고 코뮌 통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군이 코뮌을 진압했을 때 보르도에 있었다.[11]

코뮌 몰락 후, 1871년 7월 23일 클리냥쿠르 지역을 대표하는 파리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876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11] 1875년에는 의장이 되었다.[65] 1876년, 클레망소는 하원에 출마하여 18구에서 당선되었다.[11] 그는 극좌에 합류했고, 에너지와 신랄한 웅변으로 급진파 지도자가 되었다.[12] 1877년 5월 16일 위기 이후, 브로이 공작의 내각을 규탄한 공화파 다수파 중 한 명이었으며, 5월 16일 사건의 발현이었던 반공화주의 정책에 대한 저항을 이끌었다.[12] 1879년, 브로이 내각의 기소를 요구하면서 명성을 얻었다.[12][65]

1880년, 클레망소는 자신의 신문인 ''라 쥐스티스''를 창간했는데, 이 신문은 파리 급진주의의 주요 기관이 되었다.[65] 쥘 그레비 대통령 시대(1879~1887)를 거치면서 그는 정치 비평가이자 내각을 무너뜨리는 자(le Tombeur de ministères)로 널리 알려졌다.[65] 하원에서 극좌를 이끌면서 식민 정책의 적극적인 반대자였으며, 쥘 페리 총리의 정책에 반대했다. 1885년, 청불 전쟁 수행에 대한 비판으로 그해 페리 내각의 몰락에 크게 기여했다.[65]

1885년 프랑스 총선 기간 동안 그는 강력한 급진적 프로그램을 주장했고 파리의 이전 지역구와 바르주드라기냥 지역구 모두에서 당선되었으며, 하원에서 후자를 대표하기로 선택했다.[65] 1886년 샤를 드 프레시네 총리를 계속 집권하게 하도록 지지했으며, 조르주 에르네스트 불랑제를 프레시네 내각의 전쟁 장관으로 포함시키는 데 책임이 있었다.[65] 그러나 불랑제 장군이 야심 찬 위협적인 존재로 드러나자 클레망소는 그의 지지를 철회하고 이질적인 불랑제 운동의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65]

윌슨 스캔들을 폭로하고, 자신의 직설적인 발언으로 클레망소는 1887년 프랑스 대통령직에서 쥘 그레비의 사임에 크게 기여했다.[65] 그는 모리스 루비에 내각의 몰락 후 내각을 구성해달라는 그레비의 요청을 거절했고, 추종자들에게 샤를 플로케, 쥘 페리, 샤를 드 프레시네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조언함으로써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주로 책임이 있었다.[65]

불랑제주의를 둘러싼 급진당의 분열은 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고, 파나마 사건에서 코르넬리우스 헤르츠와의 관계가 일반적인 의혹으로 이어졌다.[65] 1893년 프랑스 총선에서 그는 1876년 이후 끊임없이 유지해 온 하원 의석에서 패배했다.[65]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그의 인기를 떨어뜨렸다.[65]

3. 2. 상원의원 시절 (1902-1920)

1902년 4월 6일, 클레망소는 바르 주에서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65] 그는 상원에서 좌파에서 보수파로 전향했다. 상원의원 당선 이후, 클레망소는 반교권주의적 공화주의 투쟁을 주도했으며, 1905년 정교분리법 제정에 기여했다.

1906년 3월, 모리스 루비에의 내각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규정한 법률 시행과 1906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 급진주의자들의 승리로 인한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붕괴되었다.[12] 페르디낭 사리앵은 새 정부를 이끌면서 클레망소를 내각의 내무장관으로 임명했다.[12] 클레망소는 프랑스 경찰을 개혁하고 노동자 운동에 대해 탄압적인 정책을 지시했다.[12] 그는 알퐁스 베르티용의 과학적인 경찰 조직을 지원했으며, 셀레스탱 에니옹이 이끄는 "기동대"(Brigades mobiles)를 창설했는데, 이 기동대는 "호랑이 여단"(Brigades du Tigr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2]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쿠리에르 광산 사고 이후 파드칼레에서 일어난 광부 파업은 1906년 5월 1일 광범위한 혼란을 야기할 위협이 되었는데, 클레망소는 파업자들에게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했고, 랑그도크-루시용에서 일어난 포도 재배자들의 파업도 진압했다.[12] 그의 행동은 프랑스 노동자 국제 연맹(SFIO) 사회당을 소외시켰고, 1906년 6월 하원에서 SFIO 지도자 장 조레스에게 한 그의 유명한 답변을 통해 그와 완전히 결별했다. 1906년 10월 사리앵 내각이 사임하자 클레망소가 총리가 되었다.

1907년1908년 동안 그는 영국과 새로운 ''앙탕트 코르디알''을 발전시켰다. 1905년~1906년 제1차 모로코 사태 처리와 관련하여 독일과의 어려움과 사회당의 비판은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해결되었다.

1909년 7월 20일, 클레망소는 해군의 상태에 대한 하원 토론에서 패배했다. 그는 테오필 델카세와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는데, 델카세의 기술적인 질문에 답변하기를 거부한 클레망소는 그의 의사진행 발언 제안이 부결된 후 사임했다. 그는 개편된 내각을 이끌 아리스티드 브리앙에게 총리직을 물려주었다.

1909년부터 1912년까지 클레망소는 여행, 강연, 질병 치료에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1910년 남아메리카를 방문하여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를 여행했다. 그는 프랑스 문화와 프랑스 혁명이 현지 엘리트들에게 미친 영향에 놀랐다.[16]

그는 1910년 4월 10일 ''Journal du Var''의 첫 호를 발행했다. 3년 후인 1913년 5월 6일, 그는 파리에서 매일 사설을 썼던 ''L'Homme libre''("자유인") 신문을 창간했다. 이러한 언론 매체에서 클레망소는 점점 외교 정책에 집중했고 사회주의자들의 반군국주의를 비난했다.

3. 3. 제1차 내각 (1906-1909)

조르주 클레망소는 1906년 내무장관으로 임명된 후, 프랑스 경찰을 개혁하고 노동 운동에 대해 탄압적인 정책을 펼쳤다.[12] 알퐁스 베르티용의 과학적인 경찰 조직을 지원하고 셀레스탱 에니옹이 이끄는 "기동대"(Brigades mobiles)를 창설했는데, 이 기동대는 클레망소의 별명을 따 "호랑이 여단"(Brigades du Tigre)으로 불렸다.[12]

1906년 3월, 모리스 루비에 내각이 붕괴되고 페르디낭 사리앵이 새 정부를 이끌면서 클레망소는 내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12]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쿠리에르 광산 사고 이후 파드칼레에서 일어난 광부 파업과 랑그도크-루시용에서 일어난 포도 재배자들의 파업에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했다.[12] 이러한 강경 대응은 프랑스 노동자 인터내셔널 연맹(SFIO) 사회당과의 결별을 초래했다.[12] 1906년 10월 사리앵 내각이 사임하자 클레망소는 총리가 되었다.

클레망소 내각은 노동 시간을 규제하는 다양한 개혁을 시행했다. 1919년 4월에는 8시간 노동제를 규정하는 법률이 통과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광산업계 노동자에게 8시간 노동제를 적용하는 법률이 개정되었다.[46][47][48] 1919년 8월에는 프랑스 선박에 고용된 모든 사람에게 8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다.[46][47][48]

클레망소는 1907년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면 프랑스가 중세로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1907년과 1908년 동안 클레망소는 영국과 새로운 ''앙탕트 코르디알''을 발전시켜 프랑스가 유럽 정치에서 성공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70] 1905년~1906년 제1차 모로코 사태는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해결되었다.

클레망소는 1909년 7월 20일 해군 문제에 대한 하원 토론에서 테오필 델카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 끝에 사임하고, 아리스티드 브리앙에게 총리직을 물려주었다.[70]

3. 4. 제2차 내각과 제1차 세계 대전 (1917-1920)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클레망소의 신문은 정부에 의해 검열되었다. 1914년 9월 29일부터 10월 7일까지 발행이 중단되었고, 이에 클레망소는 신문 이름을 ''L'Homme enchaîné'' ("사슬에 묶인 사람")로 바꾸고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독일 제국에 맞서 애국적인 연합을 옹호했다.[17] 전시 프랑스 정부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클레망소는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내무장관 말비에게 카르네 B를 발동하여 전쟁 노력에 대한 대중적 지지 붕괴를 막으라고 조언했지만, 정부는 따르지 않았다. 카르네 B에 등재된 반체제 인사 중 80%가 자원 입대했다.[17] 1914년 가을, 클레망소는 연합 정부에 합류하는 것을 거절했다.[18]

클레망소는 전시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며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보였는데, 이는 여론과도 일치했다. 1917년 가을,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의 참패, 러시아에서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 전 총리 조제프 카이유와 내무장관 루이 말비의 반역 가담 소문이 돌았다. 클레망소는 알자스-로렌의 독일 반환과 벨기에 해방조차도 프랑스가 동맹국을 버리는 것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독일 문서를 조사한 결과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넘겨줄 의향이 전혀 없었던 것이 분명해졌다.[19] 클레망소의 신문은 ''"메시외, 레 알레망 송 투주르 아 누아용"''(신사 여러분, 독일군은 여전히 누아용에 있습니다)라고 보도했다.[21]

1917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의 전쟁 수행이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클레망소는 총리로 임명되었다.[12] 그는 내부 불화를 막고 고위 정치인들 간의 화합을 촉구했다.[12] 총리로서 그의 거의 첫 행동은 모리스 사라유(Maurice Sarrail) 장군을 살로니카 전선 사령관직에서 해임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사회주의 정치인 조제프 카이유(Joseph Caillaux)와 루이 말비(Louis Malvy)와의 관계 때문이었다.[22][23]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


클레망소는 생도미니크 가(Rue Saint-Dominique)에 있는 전쟁부에서 통치했다. 윈스턴 처칠은 클레망소가 "감옥 뒤에서 앞뒤로 배회하는 야생 동물처럼 보였다"고 썼다.[24]

1917년 클레망소가 총리가 되었을 때 승리는 요원해 보였다. 서부 전선에서는 활동이 거의 없었고, 이탈리아는 수세에 몰렸으며, 러시아는 사실상 전투를 중단했다. 국내에서는 정부가 전쟁에 대한 시위 증가, 자원 부족, 파리에 막대한 물리적 피해를 입히는 공습에 대처해야 했다. 클레망소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가 불어넣은 자신감이 모든 전투병들에게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참호를 여러 번 방문한 것에 고무되었고, 이러한 자신감은 국내 전선으로 퍼져나갔다. 클레망소는 앙리 모르다크 장군을 자신의 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하여 정부에 대한 군대의 신뢰와 상호 존중을 고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18년 초 군사 상황이 악화되자 클레망소는 총력전 정책 – "우리는 총력전이라는 단 하나의 생각으로 여러분 앞에 섭니다." – 과 "라 게르 쥐스코 부(la guerre jusqu'au bout)"(끝까지 전쟁) 정책을 지지했다.[12] 3월 8일 그가 이 정책을 옹호하며 한 연설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클레망소의 전쟁 정책에는 정의로운 승리의 약속, 전투원들에 대한 충성, 프랑스에 대한 범죄에 대한 즉각적이고 엄격한 처벌이 포함되었다.[12]

전 프랑스 총리였던 조제프 카이요(Joseph Caillaux)는 클레망소의 정책에 반대했다. 그는 독일에게 항복하고 평화 협상을 맺기를 원했기 때문에 클레망소는 카이요를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의회 위원회는 카이요를 체포하여 3년 동안 투옥하기로 결정했다. 클레망소는 카이요의 범죄가 "승리를 믿지 않고 자국의 패배에 도박을 건 것"이라고 믿었다.[25] 클레망소는 정치적 견해에 대한 검열을 완화했다. 그는 신문이 정치 인물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부 구성원을 모욕할 권리는 침범할 수 없습니다."[26]

1918년 클레망소는 프랑스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의 14개 조항을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자는 조항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제 연맹에 관한 것을 포함하여 다른 몇몇 조항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국제 연맹이 유토피아 사회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27]

1918년 3월 21일, 독일군은 대규모 봄 공세를 개시했다. 페르디낭 포슈가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8] 독일군의 공세는 계속되었고, 클레망소는 파리가 함락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클레망소는 이러한 여론에 단호히 반대하며 하원에서 고무적인 연설을 했고, 하원은 377대 110의 압도적인 표차로 그에게 대한 신임을 표명했다.

연합군의 반격이 독일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하면서 독일이 더 이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과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클레망소는 거리에서 환영받았고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클레망소 내각의 구성원과 변동사항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총리 겸 전쟁장관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외무장관스테팡 피숑(Stéphen Pichon)
군수 및 전쟁 물자 생산 장관루이 루슈르(Louis Loucheur)
내무장관쥘 팜(Jules Pams)
재무장관루이 루시앵 클로츠(Louis Lucien Klotz)
노동 및 사회보장 장관피에르 콜리아르(Pierre Colliard)
사법장관루이 네일(Louis Nail)
해군장관조르주 레이게(Georges Leygues)
교육 및 미술 장관루이 라페르(Louis Lafferre)
농업 및 공급 장관빅토르 보레(Victor Boret)
식민장관앙리 시몽(Henry Simon (politician))
공공사업 및 교통 장관알베르 클라베이유(Albert Claveille)
상공, 산업, 해상 운송, 상선, 우정 및 전신 장관에티엔 클레망텔(Étienne Clémentel)
해방 지역 및 봉쇄 장관샤를 존나르(Charles Jonnart)



'''변경 사항'''


  • 1917년 11월 23일 – 알베르 르브룅(Albert Lebrun)이 존나르의 뒤를 이어 해방 지역 및 봉쇄 장관이 됨
  • 1918년 11월 26일 – 루이 루슈르(Louis Loucheur)가 산업 재건 장관이 되고, 군수 및 전쟁 물자 생산 장관직은 폐지됨
  • 1918년 12월 24일 – 봉쇄 장관직이 폐지되고, 르브룅은 해방 지역 장관으로 남음
  • 1919년 5월 5일 – 알베르 클라베이유(Albert Claveille)가 클레망텔의 뒤를 이어 상선 장관이 되고, 공공사업 및 교통 장관직을 유지하는 반면, 클레망텔은 상공, 산업, 우정 및 전신 장관직을 유지함
  • 1919년 7월 20일 – 조제프 누랑(Joseph Noulens)이 보레의 뒤를 이어 농업 및 공급 장관이 됨
  • 1919년 11월 6일 – 앙드레 타르디외(André Tardieu)가 르브룅의 뒤를 이어 해방 지역 장관이 됨
  • 1919년 11월 27일 – 레옹 베라르(Léon Bérard)가 라페르의 뒤를 이어 교육 및 미술 장관이 되고, 루이 뒤부아(Louis Dubois (politician))가 클레망텔의 뒤를 이어 상공, 산업, 우정 및 전신 장관이 됨
  • 1919년 12월 2일 – 폴 주르댕(Paul Jourdain)이 콜리아르의 뒤를 이어 노동 및 사회보장 장관이 됨

3. 5. 파리 강화 회의와 베르사유 조약

파리 강화 회의에서 프랑스의 전권 대표로 참석하여, 전시 내각의 총리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70] 회담이 프랑스에서 열리는 만큼 의장을 맡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각국은 합의했으며, 클레망소는 회담의 공식 언어인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구사했다.[29] 그는 프랑스 대표단을 완전히 장악했고, 1918년 12월 30일 의회에서 398 대 93의 압도적인 표차로 신임 투표를 받았다.[29] 그는 협상 진행 상황에 대해 프랑스 대통령인 레몽 푸앵카레를 배제했고, 의회가 자신이 협상하고 완료된 조약에 찬성 또는 반대 투표를 하는 것이 의무라고 말했다.[29]

클레망소는 독일이 산업 및 상업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믿었으며, 짧은 시간 안에 독일 경제가 다시 프랑스보다 훨씬 강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29] 이러한 인식 하에, 그는 독일의 배상금 규모를 최대한 크게 책정해야 한다는 여론과 의회의 강한 압력을 받았다.[42] 독일이 감당할 수 있는 액수에 대한 추정치는 20억 파운드에서 200억 파운드까지 다양했으며, 클레망소는 독일의 배상 능력을 조사할 배상위원회를 설립하여 프랑스 정부가 배상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도록 했다.[42]

라인란트 통제권을 둘러싼 오랜 분쟁에서, 클레망소는 독일이 이 지역을 소유하고 있는 한 프랑스는 동쪽에 자연 국경이 없어 침략에 취약하다고 믿었다.[32] 결국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우드로 윌슨이 독일이 도발 없이 공격할 경우 즉각적인 군사 지원을 보장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고,[33] 연합군이 15년 동안 이 지역을 점령하고 독일은 해당 지역을 재무장할 수 없다는 것도 결정되었다.[34]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20년간의 휴전입니다."라고 말했다.[36]

사르 지역의 미래에 대해서는, 클레망소는 독일이 프랑스 북부의 탄광을 고의로 파괴한 후 프랑스가 이 지역과 탄광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윌슨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로이드 조지의 타협으로 탄광은 프랑스에 주어졌고, 그 지역은 15년 동안 프랑스 행정부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그 후 투표를 통해 그 지역이 독일로 재합류할지 여부가 결정되었다.[41]

클레망소는 트리아농 조약의 엄격한 조항으로 이어져 헝가리를 해체하는데 완고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를 자결주의 원칙 내에서만 인정하는 대신, 독일과 마찬가지로 헝가리를 약화시키고 중앙 유럽 내에서 그러한 강대국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고, 클레망소는 자신이 협상한 타협안이 프랑스의 국가 이익에 부적절하다고 보는 비평가들의 비판에 맞서 조약을 옹호해야 했다. 프랑스 의회는 조약에 대해 논쟁을 벌였고, 그는 조약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쟁이 연합군에 의해 수행되었기 때문에 조약은 관련된 국가들의 최소 공통 분모를 나타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약 세부 사항에 대한 비판은 오도하는 것이며, 비평가들은 조약 전체를 보고 어떻게 그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44] 하원은 372대 53표로 조약을 비준했고, 상원은 만장일치로 비준에 찬성했다.[45]

4. 은퇴 이후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조르주 클레망소는 총리직에서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52] 1919년 프랑스 총선에서 우익 정당 연합인 국민연합이 다수당이 되었는데, 클레망소는 비공개적으로 이러한 우경화에 우려를 표했다.[50]

세실리아 보(Cecilia Beaux)가 그린 클레망소(1920)


대통령 선거 직전, 클레망소의 친구 조르주 만델(Georges Mandel)은 그에게 출마를 권유했다. 클레망소는 선거 운동을 할 의사가 없었지만, 국가적 상징으로서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선택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공화당 의원 모임의 예비 회의에서 폴 데샤넬(Paul Deschanel)이 클레망소를 누르고 후보로 선출되었고, 결국 클레망소는 출마를 포기했다.[51]

은퇴 후 클레망소는 이집트, 수단, 극동 등지를 여행하고 영국을 방문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이어갔다.[53] 특히 1922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강연을 통해 프랑스의 입장을 옹호하고 미국의 고립주의를 비난했다.[54] 그는 프랑스가 전쟁 부채를 모두 지불하는 것에 반대하는 서한을 캘빈 쿨리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지만, 미국의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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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망소는 저술 활동에도 힘을 쏟아 데모스테네스, 클로드 모네에 대한 전기와 철학, 역사, 과학을 다룬 저서를 집필했다.[55] 말년에는 회고록 집필에 착수하여, 페르디낭 포슈 원수의 회고록에 대한 반박과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비판을 담은 ''[https://archive.org/details/grandeuretmisere0000clem 승리의 영광과 비참]''(Grandeurs et miseres d'une victoire)을 사후에 출간했다.[55] 그는 자신의 사적인 편지를 모두 소각했다.

무샹의 클레망소 묘


1929년 11월 24일, 클레망소는 사망하여 무샹에 있는 아버지 곁에 묻혔다.

5. 유산 및 평가

5. 1. 클레망소와 한국과의 관계

(나다르 촬영)]]

파리 강화 회의에 일본의 전권 특사로 참석한 니시혼지 가쓰모토(西園寺公望)는 파리 유학 시절 클레망소와 같은 하숙집에서 지내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 우정은 강화 회의에서 일본의 입장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66] 하지만 다른 일화에 따르면, 일본 대표의 일본어 억양이 섞인 연설 도중 클레망소가 주변에서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저 꼬맹이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고도 전해진다.[66]

파리 유학 중이던 히가시쿠니노미야 요시히코 친왕(東久邇宮稔彦王)와도 절친한 친구인 모네의 소개로 친분을 쌓았다.[68]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원수와 함께 회견했을 때, "미국이 일본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오렌지 계획 참조'')"라는 충고를 했기 때문에, 친왕은 귀국 후 각계각층에 미일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지만, 니시혼지 가쓰모토(西園寺公望)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68] 미일 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1941년(쇼와 16년),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게 친왕은 클레망소의 충고를 전달하며 육군도 미일 협상에 협력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도조는 "나는 육군대신으로서 책임상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응답하여 친왕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68]

6. 어록

7. 기타

조르주 클레망소는 무신론자였다.[60][61][62]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으며,[57] 1923년 모네가 백내장 수술을 받도록 설득했다.[58] 10년 넘게 클레망소는 모네가 Les Nymphéas (수련)을 프랑스 국가에 기증하는 것을 완료하도록 격려했고, 이 그림들은 1927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57][58] 모네의 명작 '수련'은 클레망소의 제안으로 그려졌다.[69]

클레망소는 일본 미술, 특히 일본 도자기에 관심을 가졌고, 일본의 다도(茶道具) "향합(香合)"에 매료되어 약 3,000개의 작은 향로(고고 香合)를 수집했다.[63] 몬트리올 미술관은 1978년 그의 소장품 특별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현재 클레망소 컬렉션으로 일부가 공개되고 있다.[64]

파리 강화 회의에 일본 전권 특사로 참석한 니시혼지 가쓰모토(西園寺公望)는 파리 유학 시절 클레망소와 같은 하숙집에서 지낸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 우정은 강화 회의에서 일본의 입장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다른 일화에 따르면, 일본 대표의 일본어 억양이 섞인 연설 도중 클레망소가 "저 꼬맹이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고도 전해진다.[66]

클레망소는 중세에 남이탈리아의 섬 지역 등이 아랍인이나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았던 것을 두고 "이탈리아인은 절반이 더러운 피가 섞여 있다"라고 공언했다.[67]

파리 유학 중이던 히가시쿠니노미야 요시히코 친왕(東久邇宮稔彦王)와도 친분을 쌓았다.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원수와 함께 회견했을 때, "미국이 일본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라는 충고를 했고, 친왕은 귀국 후 미일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지만, 니시혼지 가쓰모토(西園寺公望)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68]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지하철 샹젤리제-클레망소 역과 프랑스의 항공모함 클레망소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조르주 클레망소
(나다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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